공암재(孔巖齋)



하계공(霞溪公) 휘(諱) 응운(應雲) 13세
위재(爲齋)

 

13세 휘(諱) 응운(應雲) 자(字) 중서(仲瑞) 호(號) 하계(霞溪) 행정공(杏亭公)의 손자이신 하계선생은 명종(明宗)원년(1588)에 태어나서 한강 정구(寒岡鄭逑)선생의 문하(門下)에서 수업하면서 지결(旨訣)을 구하였으며 1579년(기묘년)에 과거에 천발(薦拔)되었으나 응하지 아니하고 집에 몸을 감추었다. 그러던중 35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대장부(大丈夫)가 평화(平和)로운 날에는 독서(讀書)를 하고 의리(義理)를 쫓을것이나 이 때야말로 용기를 들어낼 때"라고 하고 한번 크게 부르짖으니 의사(義士)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의사(義士)들과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의병장(義兵長)과 함께 창령(昌寧)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올라가서 작전을 세워서 함께 싸워 왜군 수백여명의 목을 베고 죽였는데 이때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峯) 김선생이 이를 듣고 크게 칭찬 하였다고 한다.학봉선생은 늘 군문을 순찰하면서 부하들에게 훈계(訓戒)할 때 "용기와 의를 위하여 분발(奮發)할 때에는 마땅히 도응운(都應雲)과 같아야 한다"고 하였다고 한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는 다시 군량을 운반하고 군사를 모집하여 훈련(訓練)시키는등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였으며,전후 6년 동안 공을 세웠다.이에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정승}이 듣고 깊이 감복하고 찬탄(讚嘆)하면서 승현장군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에 특보(特報)하고 선무원종(宣武原從) 3등훈(等勳)에 참록(參錄)하였다.그러나 공은 이에 응하지 아니하고 관직에 취임하지 아니한채 임천(林泉)으로 돌아와서 구업(舊業)을 독수(篤修)하다가 1618년에 세상을 떠났다.

소재지 : 경북 성주군 월항면 수죽리 23(상죽방 웃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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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의정(三宜亭)
행정공정려각(杏亭公旌閭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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