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유적


  

기증자시승공파(侍承公派) 26세 학회 ( 2014520일 기증 )

 

 

조각가 도학회(都學會·한서대 교수)는 고구려 고분벽화 사신상(四神像)의 조형에 관한 조형, 관음보살 등 불교예술 조형 전문가이다. 이 좌상은 보령시 정렬사에 모셔져 있는 도미부인 영정을 토대로 하여 만들었다.

충남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724호 도응 왕지

이 문서는 조선 태조 2~6(1393~1397)에 걸쳐 7() () () 노은(魯隱)선생에게 내린 사령왕지(辭令王旨) 4()와 녹패(祿牌) 1매이다.

 

() ()선생은 고려말(高麗末) 충신(忠臣)으로 두문동(杜門洞) 72인 중 한사람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중대광문하시중찬성사(重大匡門下侍中贊成事)를 역임하였는데, 이성계(李成桂)가 새 왕조를 창건한 후 다섯 차례에 걸쳐 관직(官職)에 소명(召命)하였으나 끝내 실직(實職)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문서의 왕보(王寶)는 왕지에 조선왕보(朝鮮王寶)’, 녹패에 선사지인(宣賜之印)’이 각각 찍혀 있다. 왕지는 뒤에 교지로 바뀌며, 새보도 태종 때에는 조선국왕지보(朝鮮國王之寶)’, 경국대전이 반포된 후에는 시명지보(施命之寶)’로 바뀌어졌다. 왕지는 조선 초에 일반적으로 사용된 초서체(草書體)로 쓰여졌는데, 고려 말의 관제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 초기의 특징과 성격을 지닌 이들 문서는 고문서 연구와 여말 선초의 관제와 새보의 변천과정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문서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임명교지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981715보물 제724로 지정되었다.

 

. 홍무 26(1393) 10월 태조2년 계유(癸酉).

왕지(王旨)도응위조봉대부전의소감자

(都膺爲朝奉大夫典醫小監者).

 

. 홍무 27(1394) 9월 태조3년 갑술(甲戌).

왕지(王旨)도응위선절장군흥위위자영장군자

(都膺爲宣節將軍興威衛左領將軍者).

 

. 홍무 28(1395) 213일 태조4년 을해(乙亥).

왕지(王旨)도응위선절장군용무위사좌령장군자

(都膺爲宣節將軍龍武衛司左領將軍者)

 

. 홍무 30(1397) 1210일 태조6년 정축(丁丑).

왕지(王旨)도응위보공장호용순위사섭대장군자

(都膺爲保功將虎勇巡衛司攝大將軍者)

 

. 홍무 27(1394) 9월 태조3년 갑술(甲戌)

녹패(祿牌)왕명 준사 선절장군 흥위위좌령장군도응

(王命 准賜 宣節將軍 興威衛左領將軍都膺).

금 갑술년록 제구과 일백칠십석급경창자

(今 甲戌年祿 第玖科 壹佰漆拾石給京倉者).

 

도응(都膺), ?~1387~?

본관은 성주(星州). 초명은 유(), 자는 자예(子藝), 호는 청송당(靑松堂)이다. 부친은 찬성사 길부, 조부는 문화시중 칠곡부원군 홍정이다. 두문동 72현 중의 한 명이며 해동보감기절문(海東寶鑑氣節門)의 두 번째 서열이다. 우왕 때 벼슬이 문화시중찬성사에 이르렀으나 우왕14년 이인임이 실각하는 과정에서 부친이 죽음을 당하고 일족들이 많이 화를 입었다. 이에 홍성군 노은동에 은거하였다. 도응이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성계와 절친하였으며 장인이 문화평리상의 우인열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개국 이듬해인 1393년 태조가 특히 옛 정을 생각하여 다섯 차례나 녹봉과 직첩을 내렸으나 한 달 동안 아홉 끼의 식사를 하는 삼순구식(三旬九食)의 절식으로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태조가 그의 곧은 절의(節義)를 찬탄하여 도응의 절개는 실로 옛 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도다. 내 차마 도응의 곧은 절개를 꺾지 못하는 도다.”라고 말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자손만은 곧 나의 신하로 삼아 마땅히 대대로 음직을 주어 기용 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와 함께 청송당이란 호를 내리고 몸소 절구시를 지어 특별히 중국 비단에 금으로 글을 써서 하사하였다. 이때의 왕지(王旨) 4매와 녹패(祿牌) 1매가 1981년에 보물 724호로 지정되었다. 우왕13(1387) 815일에 정몽주, 길재 등 13명이 고려태조가 후삼국을 통일 할 때 중요 결전지인 팔공산 동화사에 모여 고려 태조 왕건의 시 소사(所思)에 있는 호계삼소(虎溪三笑)’구절의 깊은 뜻을 감상하고, 열세명이 지은 연구(联句) 가 전해오고 있다. 도응의 시구는 십년동안 오로지 사명을 받들어 천고의 문화를 나타내도다(十年專使命 千古見文華)라는 것이다. 정몽주의 피살 소식을 듣고는 우리는 죽을 사()자 하나 뿐이니 죽음을 명백히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행적을 전하는 글로는 <청송당도선생실기><신도비문>이 있으며 묘지 가까이 경충제(景忠齊)가 있다. 1808년에 성주 운천서원에 배향되고, 1832년 장성 경현사(景賢司)와 개성의 두문동 서원에 모셔졌다. 200710월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되었다.

 

 

기증자청송당공파(靑松堂公派) 26세 재홍

( 청송당(靑松堂) 종중(宗中) 소장 )

열녀서씨포죽도는 세종실록, 속삼강행실도,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열녀 서씨에 관한 그림으로, 1759년 조선 정조 때 화가인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출생·사망연도 미상)의 작품이다.

 

그림의 내역은 다음과 같다. 서씨의 남편 도운봉(都雲蜂)이 결혼 수년 만에 죽자 서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이 만들어 놓은 뒤뜰 대나무밭에 가서 17년간 이나 애절하게 울었는데, 어느 날 그곳의 대나무가 흰 대나무로 자랐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당시 경상감사가 이것을 상소로 올리자 이를 접한 세종대왕이 백죽도를 그려 올리라 명하고, 이어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주고 홍문을 세우게 하고 시를 지어 하사하였다. 세종대왕 당시에 어명으로 그린 그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나 규장각의 장서각 또는 외국에 유출되어 현존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50여년 이후 후손인 도필구가 장수도(영천 신령 지역) 찰방으로 와 있던 화산관에게 세종대왕이 하사한 시를 그림으로 그려 달라고 부탁하자, 이에 감복한 화산관이 그림과 함께 세종대왕의 시를 함께 써놓은 것이 서씨열녀포죽도. 화산관은 정조의 어진을 그렸으며, 당시 김홍도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한 화가였다. 이 그림은 20121021KBS 프로그램 ‘TV쇼 진품명품지방출장감정에서 발견되어 본 방송으로 이송 방영 되었으며 감정가가 무려 10억이나 책정되어 세간을 놀라게 하였다.

 

어제시(御製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號天抱竹涕汍瀾 대를 잡고 울부짖어 눈물 쏟음에

호천포죽체환란

一夜新篁白數竿 어느 날 밤 흰 대나무 여러 포기 돋아 났네

일야신황백수간

高節凜然驚世俗 뛰어난 높은 절개 세상 사람 다 놀라니

고절늠연경세속

九重描上畵圖看 깊고 깊은 궁궐에서 백죽도를 보느니라.

구중묘상화도간

 

千古瀟湘怨不窮 그 옛날 소상강에 맺힌 한 다함이 없어

천고소상원불궁

年年竹上見斑紅 해마다 대 위에 붉은 무늬 모이구나

연년죽상견반홍

須知素節無今昔 고금에 변함없는 맑은 절개 알겠노니

수지소절무금석

白笋新生一兩叢 한 두 포기 흰 대나무 새로이 돋아났네

백순신생일량총

 

금호 선사 선유도는 1601323일에 행한 뱃놀이 창수(唱酬;시문을 지어 서로 주고 받음)기록인데, 당시 유림 23명이 주자의 어정시(漁艇詩) 오절(五絶)을 분운분자(分韻分字)하여 지은 한시 15수를 싣고, 끝에 여감호의 서문이 있는 희귀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한국문학사상에 있어서 시회에서 오절(五絶) 전체를 분자분음(分字分韻)삼고, 풍류운사를 즐긴 예는 이것이 처음인 듯하고, 완락재(玩樂齋)란 사립교육기관설립 축하 뱃놀이란 점에서 교육사상 높게 평가할 수 있으며, 조형규의 뱃놀이 산수화 또한 조선조 후기 겸재풍(謙齋風)을 영향받아 이루어졌으므로 회화사 상에도 높은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원본은 서대교씨 소장본인데, 낙재선생의 주손(胄孫) 서대교씨가 인쇄하여 세상에 알렸다.

 

금호선사선유도록(琴湖仙査船遊圖錄)

서사원(徐思遠)-행보(行甫)경술생,

여대로(呂大老)-성우(聖遇)임자생,

장현광(張顯光)-덕회(德晦)계축생,

이천배(李天培)-경발(景發)무오생,

곽대덕(郭大德)-돈부(敦夫)무오생,

이규문(李奎文)-사빈(士彬)임술생,

송후창(宋後昌)-중유(仲裕)계해생,

장내범(張乃範)-정보(正甫)계해생,

정사진(鄭四震)-군섭(君燮)정묘생,

이종문(李宗文)-학가(學可)정묘생,

정 용(鄭 鏞)-진보(振甫)정묘생,

서사진(徐思進)-진보(進甫)무진생,

도성유(都聖兪)-정언(廷彦)신미생,

정 약(鄭 鑰)-공계(公啓)임신생,

정 수(鄭 錘)-평보(平甫)계유생,

도여유(都汝兪)-해중(諧仲)갑술생,

서 항(徐 恒)-덕고(德固)갑술생,

정 연(鄭 鋋)-정보(靖甫)을해생,

정 선(鄭 銑)-윤보(潤甫)기묘생,

서사선(徐思選)-정보(精甫)기묘생,

이흥우(李興雨)-이옥(而沃)기묘생,

박증효(朴曾孝)-여순(汝順)신사생,

김극명(金克銘)-여근(汝謹)신사생,

 

 

   

序文

 

이천장(伊川庄)이란 행보(行甫) 서사원이 사는 곳인데 행보는 정이천(程伊川)처럼 성리학(性理學)에 뜻을 두고 이천장에서 산다. 땅은 비록 수천만 리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하늘이 이런 이름을 지어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천의 물은 세차게 그치지 않고 흘러 낙동강과 합류하니 이것이 어찌 중국의 이락(伊洛)의 학문을 행보가 받아들여 자신의 것을 만들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덕회(德晦) 장현광은 행보와 뜻이 같은 벗인데 마침 인동고을 옥산(玉山)으로부터 와서 종유(從遊)한 자인데 모두 기약을 하지 않고 모여 무이서원(武夷書院) 도가(櫂歌)의 흥을 뒤따라 배를 타고 선사고사(仙査古寺)를 찾아갔더니 절 아래는 바로 유선(儒仙) 최치원(崔致遠)이 유람하던 곳으로 세월이 무상한 자취가 완연하였다.

 

그날 미풍이 그치지 않고 불고 하늘의 구름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둑과 꽃과 못가의 버드나무가 울긋불긋 10리에 비단병풍을 둘러친듯하여 참으로 거울같이 아름다워 사미이난(四美二難)1)을 모두 갖추어 인간세상 백년에 한번 만날 좋은 놀이였다.

층층 기암절벽과 멀리보이는 모래밭은 화필(畵筆)이 아니면 형상할 수가 없었다. 저녁노을이 살짝 깔릴 때 강에 배를 띄워 가니 강정(江亭)은 바로 진사 윤대승(尹大承)이 지은 것으로 병란(兵亂)에 불타버리고 윤 진사가 죽은 지 10여년이 채 안되었다고 한다.

 

황폐한 대()만 홀로 남아 저녁 비를 맞는데 대나무와 소나무 그림자가 빈뜰에 우거져 사람으로 하여금 무한한 감회를 일어나게 한다. 날이 저물려고 하여 남은 몇 칸 방으로 들어가 쉬려고 하는데 방이 좁아서 나와 사빈(士彬) 이규문은 다시 학가(學可) 이종문의 집으로 갔다.

 

날이 밝아서 여러 사람들이 뒤 따라 왔는데 새벽에 비가 내려 일행이 축축하게 젖은 옷이 바람에 날리니 마치 신선의 옷이 공중에 벌럭이는 듯했다. 배안에서 운자(韻字)를 내어 나누어 시를 지었다.

 

여러 현인들이 다투어 주회암(朱晦庵)의 절구를 따라 외웠는데 유독 진사 학가(學可) 이종문 만이 도리원(桃李園)에 앉아 짓지 못해 벌주(罰酒)로 세잔을 마셔야 했으니 이는 금곡원(金谷園)의 벌주 규정에 의한 것이다.

 

덕회(德晦) 장현광이 장() 자를 얻어 내가 그 뒤를 이어 읋고는 서로 바라보고 크게 웃고는 파했다. 헤어지려니 섭섭한 마음이 끝이 없는데 해가 이미 서산에 걸렸다. 아름다운 모임이 꿈만 같았는데 문득 전날의 일을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할 뿐이다. , 10년 동안의 전란을 격은 사이 그중 몇 사람이나 살아 있을 것인가?

 

또 비록 세상에 살아 있더라도 함께 다 같이 모일 수 있는 것이 몇 번이나 될 것인가? 지금 모이기로 기약하지 않고도 함께 모인 자가 23명이나 되니 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될 일이겠는가? 반드시 그렇게 시킨 자가 있을 것인데 누구인가를 모를 뿐이다. 종전에 헤어졌다가 모이고 모였다가 헤어진 것이 모두 하늘의 처분이었으니 다른 해 이날에 이 몸이 또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할 수가 없고 비록 모이더라도 또 다 모일 수는 없는 것이다.

 

또 후세 사람들이 오늘 우리의 모임을 사모하기를 오늘 우리가 옛날 사람들의 모임을 사모하듯 사모할 줄을 알겠는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수사(秀士) 김극명(金克銘)이 이런 아름다운 일이 후일 묻혀버릴 것을 염려하여 나에게 서문을 쓰라고 부탁하는데 내가 글을 잘 못한다고 사양할 수가 없었다. 해는 신축년이요 때는 늦은 봄 23일이다.

 

 

<1601(선조 34) 음력 323>

성산(星山)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는 서()한다.

도성유(都聖兪)

- () 정언(廷彦) () 신미(辛未) 거달성(居達成)

 

仙査船遊 分韻朱子漁艇詩 得猿字五言古詩

선사 뱃놀이에서 주자의 어정시로 운을 나누었는데 원()자를 얻다.

(5언 고시)

 

日暮輕棹疾(일모경도질) 해질 무렵 가벼운 노 급하니

日暮輕棹疾(일모경도질) 초나라 산협의 원숭이 소리 듣는 듯

巖花紅綺爛(암화홍기란) 바위의 꽃은 붉은 비단처럼 난만하고

汀柳綠袍翻(정류녹포번) 강둑의 버들은 푸른 도포처럼 나부끼네

追陪作高會(추배작고회) 어른들 모시고 높은 모임 이루니

綢繆情更敦(주무정갱돈) 친밀한 정 더욱 돈독하네

何幸干戈後(하행간과후) 다행히 전쟁을 겪은 뒤

重傾酒一罇(중경주일준) 거듭 한 동이 술을 기울이네

閒分白鷗戱(한분백구희) 한가한 분수는 백구와 희롱하고

心逐孤雲奔(심축고운분) 마음은 외로운 구름 쫓아가네

收將不盡意(수장불진의) 다하지 않은 뜻을 거두어 가지고

更泝伊洛源(갱소이락원) 다시 이락의 근원으로 거슬러 오르네

 

 

도여유(都汝兪)

- () 해중(諧中) () 서재(鋤齋) () 갑술(甲戌) 거달성(居達成)

 

辛丑暮春 泛舟琴湖 分韻得友字五言長篇

신축년(1601) 모춘에 금호강에 뱃놀이 하며 운을 나누어 시를 짓는데 자를 얻다.(5언 고시)

 

光風三月暮(광풍삼월모) 풍광 좋은 늦봄에

邂逅東南友(해후동남우) 동남의 벗 우연히 만났네

滿載一葉船(만재일섭선) 한 조각 배에 가득 타고

繫馬巖邊柳(계마암변류) 바윗가 버들에 말 매었네

唱和百篇詩(창화백편시) 백편의 시 주고 받고

自酌一罇酒(자작일준주) 한 동이 술 절로 마시네

先生樂有餘(선생락유여) 선생은 즐거움 넉넉하고

小子分左右(소자분좌우) 소자들 좌우로 나누어 모시네

濯足淸江上(탁족청강상) 맑은 강 가에 발을 씻으니

何羨羊裘叟(하선양구수) 어찌 양구의 노인 부러울까

只恨分袂去(지한분몌거) 다만 한스럽긴 헤어져 떠나면

何處追先後(하처추선후) 어디에서 서로 따를까

병마우후부군 흠조(欽祖) 묘지명(墓誌銘)

 

< 어모장군 행 경상좌도 병마우후부군(:흠조) 묘지석 >

공의 휘는 흠조(欽祖). 자는 경선(敬先)이니 그 선조는 성주 사람이다시조 휘 미()는 백제 개루왕(蓋婁王)때에 벼슬을 하였으니 사적이 삼강행실록에 보인다

 

그 후에 휘 진()은 칠곡 부원군이다

휘 순(). 휘 충박(忠朴). 휘 유도(有道)가 계셨으니 삼대를 연이어 공조전서(工曺典書)와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지냈다자손은 대대로 고려조를 섬겨서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고려말에 공조전서(工曺典書) 휘 항()이 계셨으니 곧 공의 5대조이다증조 휘 윤안(允安)은 소위장군(昭威將軍) 이다조부 휘 의문(義文)은 첨사(僉使)이다부친 휘 순경(舜卿)은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모친은 곤산류씨(崑山柳氏) 이니 증병조참판 휘 소창(沼昌)의 따님이다

 

공은 정덕(正德) 1515(을해)년에 나셔서 가정(嘉靖) 1535(계해)년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49세이다처음에 무관으로 천거되어 인차외만호(仁遮外萬戶)에 제수되었다옮겨져서 경상좌도병마우후(慶尙左道兵馬虞侯)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하기 전에 돌아가셨다칠곡 오곡(梧谷) 건좌(乾坐) 손향(巽向) 등성에 장사지냈다

 

숙인은 성산이씨(星山李氏)이니 광평군(廣平君) 휘 능()7세손이다부친 휘 수문(秀文)은 교위(校尉)이다조부 휘 회()는 무과에 급제하였다증조 휘 적상(迪祥)은 한산군수(韓山郡守)이다모친은 탐진유씨(耽珎兪氏)이니 은거하고 벼슬하지 않은 휘 응하(應夏)의 따님이다부인은 정덕(正德) 1523(계미)년에 태어나서 만력(萬曆) 1601(신축)년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79세이다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아들이 넷인데 원국(元國). 원결(元結). 무과에 급제하여 군수가 된 원량(元亮)이고마지막은 원례(元禮)이다

 

딸은 하나인데 순천(順天) 박이현(朴而絢)에게 출가했다손자는 여섯이니 성유(聖兪). 생원 응유(應兪). 무공랑 여유(汝兪). 언유(彦兪). 무과에 급제하여 판관이 된 이유(以兪). 평양서윤(平壤庶尹) 경유(慶兪)이다손녀는 셋이니 감사 남선(南銑), 사인(士人) 전이성(全彛性), 박용(朴鎔)에게 출가했다증손은 아홉이니 신휘(愼徽), 문과에 급제한 신수(愼修), 신위(愼衛). 진사 신여(愼與), 신의(愼儀), 신행(愼行), 신징(愼徵), 신형(愼衡), 신중(愼中)이다박이현은 남을 두었으니 종서(宗緖), 영서(永緖), 흥서(興緖), 윤서(潤緖)인데 영서는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通政) 이 되었고윤서는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이 되었다내외의 자손들이 3백여 명이다

 

공은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너그럽고 인자하였다기국(器局)이 원대하여 재주가 세상에서 쓰일만했는데도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났다부인은 부덕이 단정하고 규범이 엄숙하여 여러 자식을 잘 가르치고 길러서 집안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않았으니자손이 번성하고 대대로 화목함을 돈독히 하는 것은 대개 그 까닭이 있는 것이다

 

공의 장사를 지낸지 80여년이 지났다성유(聖兪)등이 훗날 고찰할 것이 없을까 크게 두려워하여 삼가 슬픔을 머금고 대략을 기록하여 불후함을 드러내고 마침내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면면히 이어지는 우리 도씨는 백제와 고려에 혁혁 하였네

우리 공에 이르러서 그 아름다움을 이루게 되었네

하늘이 덕을 주었으나 수명을 주지는 않았네

 

그 부인께서 그 짝에 마땅 하였네

공은 현달하지 못하고 막혀서 이로써 우리에게 은혜를 끼쳤네

우리 손자와 증손들이 대대로 보답을 받았네

 

너희가 그유래를 알지 못한다면 어찌 너희가 드날릴 수 있겠는가

높은 이 언덕에 무덤이 매우 빛나네

경건히 가정의 가르침을 본받아야 하리니 어찌 감히 혹 쇠하게 하겠는가

 

 

숭정 91636(병자)8월 모일에

증손 통훈대부 호조정랑겸 춘추관기주관 신수(愼修)는 삼가 적다

 

 

 

 

 

한성부우윤 원결(元結) 묘지명(墓誌銘)

 

< 증 가선대부 한성부우윤 겸 동지의금부사부군(:원결)의 묘지석 >

 

 

공의 휘는 원결(元結)자는 충경(忠卿)이고 본관은 성주이다. 비조 휘 미()는 백제에서 벼슬하여 이름을 드러내었다. 그 후에 벼슬이 끊이지 않아 칠곡부원군 휘 진()휘 순()휘 충박(忠朴)휘 유도(有道)가 있었으니,모두 경상(卿相)의 지위에 올랐다. 대조 휘 항()은 고려 말에 관직이 공조전서(工曺典書)에 이르렀다. 증조 휘 의문(義文)은 첨사(僉使)를 지냈다. 조부 휘 순경(舜卿)은 벼슬하지 않았다. 부친 휘 흠조(欽祖)는 우후(虞侯)를 지냈다. 모친 숙인 성산 이씨(星山李氏)는 광평군(廣平君) 휘 능()대손이고 병절교위(秉節校尉) 휘 수문(秀文)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1551612일에 태어나고 만력(萬曆) 159347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43세이다. 칠곡 오곡(梧谷) 건좌 손향 등성의 선영 서쪽 첫째 언덕에 안장하였다.

 

정부인(貞夫人)은 부계 홍씨(缶溪洪氏)이니 사인(舍人) ()의 현손이고 증 참의 제문(悌文)의 따님이다. 부인은 가정(嘉靖) 1584713일에 태어나고 만력(萬曆) 161328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66세이다. 공의 묘 동쪽 가에 합장하였다.

 

공은 효성과 우애에 있어서 대개 천성이어서 그 도를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고서 가정에서 행하였고 여러 아우와 자질들을 가르쳐서 여기에 힘입어서 성취된 이가 많았다. 비록 몸이 드러나지 못하고 궁하게 지냈지만, 마을에서 모두 선인이라고 칭송하였는데 불행히 수명이 짧았다.

 

부인은 성품이 어질면서도 부드러워서 부도를 깊이 얻었고 일을 처리할 때 어긋남이 없었다. 덕을 심고 선을 쌓아서 오로지 이로써 마음을 삼았으니,곧 종족과 인척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뻐서 복종하여부인이 훗날의 경사가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아들 하나는 여유(汝兪)이니 무공랑(務功郞)이다. 무공랑은 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문과에 급제한 신수(愼修), 진사 신여(愼與)학문을 일삼은 신행(愼行)과 신징(愼徵)이다. 딸은 하자수(河自洙), 이분(李棻), 이안적(李安迪)에게 출가했다. 공은 측실에게 두 아들 명유(命兪), 득유(得兪)를 두었는데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내외의 여러 자손이 50여명이다.

 

공이 돌아가신지 40여 년이 되는데 묘도(墓道)에 아직 비석이 없다. 불초손 신수(愼修)는 조부의 행적이 민멸되어 전해지지 못할까 삼가 두려워하여 감히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우리 조부를 내가 아노니

그 덕성과 행실은 누군들 이만할 수 없었네

능히 그 아름다움을 짝함은

내조한 조모의 마땅함 일세

 

아름다움이 있는데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 불초손의 허물을 무겁게 하리라

넘치지 않고 바른 말이니

이로써 우리 후손에게 고하네.

 

 

숭정(崇禎) 병자년 월 모일에

손자 통훈대부 행 호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 신수(愼修)는 적다.


 

신여(愼與) 통훈대부(通訓大夫) () 사복시정(司僕寺正) 교지

 

< 사복시정(司僕寺正) 신여(愼與)의 교지 >

 

 

 

영조43(1767) 증손(曾孫) 계상(啓祥)이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2)가 됨에 추증된 교지이다. 신여공은 생전에도 품계가 정 3품인 통훈대부였으나 관직이 정오품에 해당하는 예조정랑이어서 정삼품에 해당하는 사복시정으로 추증하였다.

 

의법전(依法典)’의대전(依法典)’은 당상관처고신식(堂上官妻告身式)과 추증식(追贈式)에 사용되었는데 의법전(依法典)’전록통고(典錄通考)”가 반포된 후 1691년부터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추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문무관 이품(二品) 실직(實職) 이상자의 삼대(三代)였으므로 추증의 원인을 제공한 관직자(根因者)와 그 관직, 또 그 근인자와 추증을 받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어떠한지가 포함되어야 했다. 이때 기재 순서는 추증 근인자의 관직과 성명을 쓰고 추증 받는 자와의 관계를 기록한 뒤 추증받는 자의 관직을 기재하는 순이다. 증조(曾祖)부모와 조부모의 경우는 본인보다 한 품계 낮게 추증하였다. 계상공의 경우 삼대에 걸친 추증 교지 모두가 보존되어 있다.

 

敎旨

通訓大夫行禮曺正郞兼 春秋館記注官都愼與贈通訓大夫司僕寺正是正者

乾隆三十二年十二月二十日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都啓祥曾祖考依法典追 贈

 

도신여(都愼與) 1605~1675

자는 명숙(明叔), 호는 휘헌(撝軒)인데 생부(生父)가 서재공(鋤齋公) 도여유(都汝兪)이고 양직당 도성유(都聖兪)의 계자(系子)이다. 1633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신묘(1651)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용담(龍潭), 김제(金提)등 현감을 역임하고 숙종 을묘(1675)에 성균사예가 되었고 향년 71세에 졸하다.

 

영상 허적(許積)과 이판 오시수(吳始壽)가 염습을 하고 상여 운반에 100여인이나 투입되었으며 영이(靈輀)가 하사되었고, 국풍이 연을 띄워 잡은자리(신령 화산 정상)에 묘터를 잡았다 한다. 갈암 이현일(李玄逸)이 갈문을 짓고 부사 박명섭(朴明燮)이 문집 서문을 썼다.


 

이익(爾益) 통덕랑(通德郞)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교지

 

 

<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이익(爾益)의 교지 >

 

영조43(1767) () 계상(啓祥)이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2)가 됨에 추증된 교지이다. 이익공은 생전에 통덕랑(정오품)이었으므로 손자인 계상공보다 한 품계 아래인 정3품의 상계(上階)인 통정대부로 추증되었다.

 

 

敎旨

通德郞都爾益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者

乾隆三十二年十二月二十日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都啓祥祖考依法典追 贈

 

 


 

  1 · 2 · 3

 

주소

(지번)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237번지 4층 (우)42929
(도로명)대구 달성군 다사읍 서재로7길 20(우)42929
성주도씨 대종회

연락처

전 화 : 053.473.9613
팩 스 : 053.474.9613
E-mail : sungjudo@naver.com

농 협 : 351-0486-1165-53
예금주 : 성주도씨대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