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유적

아주신씨(鵝洲申氏)
월성최씨(月城崔氏)
순천이씨(順天李氏)
위각(爲閣)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에 위치한 정려(旌閭) 삼문(三門)

아주신씨(鵝州申氏) : 서재공(鋤齋公)의 육대손 필상(必祥)의 아내로 남편을 여의고 후사마저 없이 자결하니,그의 하인이 장사지내고 그의 영혼을 기리는 제사까지 모셨다.
정조(正祖) 계묘년(1783년)에 정려가 내려졌다.

월성최씨(月城崔氏) : 양직당(養直堂)의 팔대손인 필해(必海)의 아내로 나이 이십세에 남편이 조몰(早沒)하니 마침 임신중이라 분만을 기다렸다가 순산한 후 순절(殉節)하여 순조(純祖) 갑오(1863년)에 조정의 특명으로 정려되다.

순천이씨(順天李氏) : 양직당(養直堂)의 팔대손인 진극(鎭極)의 아내로 남편이 요절하고 후사마저 없이 상례를 다한 후 시가(媤家)와 친정에 애틋한 유서를 남기고 순절하여 헌조(憲祖) 임인(1842년)에 조정에서 효열(孝烈)을 표창하는 정려가 내려졌다.

 

소재지 :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693-5

효자공(孝子公) 휘(諱) 금동(今同) 14세
위각(爲閣)

 

 

 


소재지 : 경북 의성군 봉양면 사부리(동곡)

송재공(松齋公) 휘(諱) 명천(命天) 23세
서산공(書山公) 휘(諱) 명찬(命燦) 23세
위각(爲閣)

 

23세(世) 휘(諱) 명천(命天) (1762-1835) 본(本) 쌍효각(雙孝閣)은 명천(송제공)(命天(松齊公))과 23세(世) 휘(諱) 명찬(서산공)(命燦(書山公))을 모신 각(閣)으로 두분은 재종간(再從間)이었다.
휘(諱) 명천(命天)은 현감 이억(縣監 以億)의 12대손(12代孫)으로 자(字) 천보(天甫) 호(號) 송제(松齊) 영조(英祖) 임오(壬午) 1762년생(年生) 6세(歲)때 부친(父親)을 여의고 편모(偏母) 슬하(膝下)에서 자랐는데 성장(成長)한 후(後) 다른사람이 부모(父母)의 당상(當喪)에 상복(喪服)을 입고 거상(居喪)함을 보고 감동(感動)하여 추복(追服)으로 시묘(侍墓)를 살았는데 까마귀 한 쌍(雙)이 묘수(墓樹)에 둥지를 틀고 6년(年)동안 동거(同居)하였다.
어느날밤 꿈에 현몽(現夢)하기를 나는 삼각산(三角山) 신령(神靈)인데 팔방(八方)을 둘러보았지만 그대같이 진실(眞實)된 마음을 보지 못하였다. 그대는 마땅히 나를 위하여 수고 할 지어다.하고 홀연(忽然)히 사라졌다.
이러기를 연(連) 3번 거듭하기에 관(官)에 고(告)하면서 국가(國家)에 망극지통(罔極之痛)이 있을것이라고 하였더니 공(公)을 요사(妖邪)한 말이라하여 결박(結縛)하고 19일간(日間) 투옥(投獄)하였다.
과연(果然) 국상(國喪)이 생겨 정조 대왕(正祖 大王)께서 승하(昇遐)하시자 공(公)은 사면(赦免)되어 설단배곡(設壇拜哭)하고 3년간(年間) 방립(方笠)을 쓰고 상신(喪身)의 예(禮)를 행(行)하였다.
이후(以後) 사림(士林)에서 공(公)의 충(忠)과 효(孝)를 상달(上達)하여 광서 13년(光緖 13年) 1887년 동몽교관(童蒙敎官)을 배수(拜受)받아 이어 다시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정여(旌閭)를 명(命)하였다.
휘(諱) 명찬(命燦)은 자(字) 성은(聖恩) 호(號) 서산(書山) 1804년(갑자(甲子)) 2월(月) 18일생(日生).
모상(母喪)에 추복(追服)으로 3년간(年間) 려막생활(廬幕生活)을 할때는 대호(大虎)가 수행(隨行)하고 야작(野雀)이 묘당(墓堂)에 언제나 날아와 앉아서 묘역(墓域)을 해(害)하는 미물(微物)을 막아 보호(保護)하였다.
국상(國喪)이 있을때마다 설단(設壇)하여 배곡(拜哭)하였으며 방립(方笠)을 쓰고 3년간(年間) 거상(居喪)하였다.
공(公)의 충의(忠義)와 효행(孝行)을 왕(王)께서 들으시고 높이 칭송(稱頌)하고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追贈)하고 정여(旌閭)를 명(命)하였다.
경효사(景孝祠)에 배향(配享)되고 3월(月) 중정일(中丁日)에 향사(享祀)함

소재지 : 경북 예천군 용궁면 덕계리

행정공(杏亭公) 휘(諱) 형(衡) 11세
정려각(旌閭閣)
경북도문화재524호

 

 

 


소재지 : 경북 성주군 월항면 보암리(묵산)

보호각 전경 청송각(靑松閣)

 

종중문서(宗中文書)의 보관 관리

성주 도씨 종중문서(星州都氏宗中文書)
이 문서는 조선 태조 2~6년(1393~1397)에 걸쳐 7세(世) 휘(諱) 응(膺) 노은(魯隱)선생에게 내린 사령왕지(辭令王旨) 4매(枚)와 녹패(祿牌) 1매이다.
휘(諱) 응(膺)선생은 고려말(高麗末) 충신(忠臣)으로 두문동(杜門洞) 72인 중 한사람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중대광문하시중찬성사(重大匡門下侍中贊成事)를 역임하였는데, 이성계(李成桂)가 새 왕조를 창건한 후 다섯 차례에 걸쳐 관직(官職)에 소명(召命)하였으나 끝내 실직(實職)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왕지에 쓰여진 관명(官名)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관직이 혼용되고 있으며,「조선지보(朝鮮之寶)」라는 새보(璽寶)는 태종(太宗) 이후나 경국대전(經國大典) 반포 후에 사용된 것과 다르다.
그리고 서체는 조선 초에 일반적으로 사용된 초서체(草書體)로 쓰여졌다.
이 문서(文書)는 관제의 변천과정 새보의 사용경위, 서체의 변천등 고문서(古文書)의 양식(樣式)과 변천과정을 구명(究明)하는데 근거가 되는 역사적인 자료이다.
이 문서는 1981년 7월 15일 「보물 제724호」로 지정되었다.
건립 년도 : 정부보조금과 종인 들이 염출(斂出)한 돈으로 1987년 5월 24일 건립하였다.
이날「성주도씨종중문서보호각건립기념비(星州都氏宗中文書保護閣建立紀念碑)」의 입석과 「문화재 보물 제724호 국가지정 보호각건립지(文化財 寶物 第724號 國家指定保護閣建立誌)」가 발간되었다.

보호각 외부 전경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관동길 66-21

정부인달성서씨[8세 휘(諱) 운봉공(雲峯公)의 배위(配位)]의 열녀사적을 표창한 세종의 어제시와 행장을 명각(銘刻)한 정려비각(旌閭碑閣)

 

세종 22년(1440년) 효령면 병수1리(속칭 관동(官洞) 잉여골) 도로변에 건립.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 조정의 복구령에 따라 영조8년(1732년)에 재건.
정조 20년(1796년) 현 위치에 이건.

정부인 열녀 서씨 사적

고려 우왕 14년(1388년) 경상도에서 태어난 서씨 부인은 어릴 때부터 효행으로 유명하였다. 태종 12년(1412년) 고려 충신 청송당(靑松堂) 휘(諱) 응(膺)공의 제4자인 운봉(雲峯)공과 결혼하여 군위 성동으로 이사하였다.
서씨 부인은 28세 되던 태종 16년(1416년) 부군을 여의고 17년간이나 후원의 대숲에서 슬퍼하던 중에 세종 15년(1433년) 봄, 흰 대(백죽) 세 포기가 돋아나는 이적(異蹟)이 있었다.
세종 20년(1438년) 서씨 부인 50세때 세종대왕은 백죽도를 그려 올리도록 하고, 그해 7월 복호(復戶 : 조세, 부역 등을 면제), 정려[旌閭 :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 등이 살던 고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케 하고 아울러 정부인 첩지와 어제시(御製詩) 2수(首)를 내리었다.

 

소재지 : 경북 군위군 효령면 성리 101번지 전(田) 앞

인재공(忍齋公) 휘(諱) 처중(處中) 16세
위정려(爲旌閭)


소재지 : 논산시 상월면 한천리

휘(諱) 봉근(鳳根) 24세 처(妻) 광산김복이(光山金福伊)
위정려(爲旌閭)


소재지 :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정암리 솔둔지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휘(諱) 거원(擧元) 19세
위문(爲門)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용안면 덕용리 山233-2


 

주소

(지번)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237번지 4층 (우)42929
(도로명)대구 달성군 다사읍 서재로7길 20(우)42929
성주도씨 대종회

연락처

전 화 : 053.473.9613
팩 스 : 053.474.9613
E-mail : sungjudo@naver.com

농 협 : 351-0486-1165-53
예금주 : 성주도씨대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