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유적

동사열전(東史列傳)에 이르기를 후한 환제(後漢 桓帝) 연희시(延熹時)(158~166)에 백제 개루왕(百濟 蓋婁王)을 보좌(輔佐)하였다.
백제 정승(百濟 政承)으로 칭해지고 있다.

 

동방의 열녀 도미부인(東方 烈女 都彌夫人)

부인의 열행은 역사적 기록인 삼국사기(三國史記), 동국통감(東國通鑑),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에 등재되어 있으며 충남보령시에서 1990년 이곳에 도미부인(都彌夫人)열행의 사적지임을 고증하는 경기대학 학술조사 보고서에 따라 19925월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상사봉(相思峰)에 정절각(貞節閣), 19945월에 상사봉 기슭에 정절사(貞節祠)를 건립하고 1996930일 만세보령(萬世保寧) 문화제 전야제에서 부인의 영정(影幀)을 봉안하였으며, 오래 전부터 도미공(都彌公) 부부의 묘소가 경남 진해시 청안동 해안의 낮은 산기슭에 있음이 전래되어, 도씨종중(都氏宗中)100여년 전부터 이를 보호 관리하고 묘제를 올렸다. 그런데 근년에 묘역일대가 택지로 조성됨으로써 묘지를 보령시와 도씨종중이 협의 조력하여 2003610일에 도미양위분(都彌兩位分)의 묘소를 정절사(貞節祠) 우측에 면례(緬禮)하였다. 도미부인의 정절은 디지털문화가 범람하는 이시대에 후세 교육의 귀감이 되고 있다.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2세(世) 휘(諱) 충박(忠朴) 자(字) 순인(純仁)
고려(高麗) 전리상서(典理尙書)의 묘(墓)
배(配) 정경부인(貞敬夫人) 순천장씨(順天張氏) 합부(合附)
매년(每年) 청명날(淸明)에 봉사(奉祀)한다.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지경리 山4

18세(世) 휘(諱) 성유(聖兪) (1571~1649)
자(字)는 정언(廷彦),호(號)는 양직당(養直堂).성리학자(性理學者)
정한강(鄭寒岡),서낙재(徐樂齋)를 사사(師事)하였으며 달성십현(達城十賢)의 한 분이며,임란(壬亂)때 창의(倡義)에 참여하고,정치적 혼란으로 은일지사(隱逸之士)로 일관하였다.

 

 

소재지 : 경북 칠곡군 지천면 오산리 산54

18세(世) 휘(諱) 여유(汝兪)
자(字)는 해중(諧仲),호(號)는 서재(鋤齋)
한강(鄭寒岡),낙재(徐樂齋) 양문에 사사(師事)받았으며 달성십현으로 추앙되었고 이괄(李适)의 난에 창의를 도모하며 무공랑(務工郞)에 올랐다.
아들 사형제가 모두 과시(科試)와 조정에 나아가 향림(鄕林)이 추종하였으며 이에 공의 호를 따서 마을 이름을 서재(鋤齋)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소재지 : 대구시 달성군 다사면 박곡리 산33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 휘(諱) 원량(元亮)(17世)의 장자로 선조(宣祖) 7년(1574) 갑술생이시며, 조(祖)는 경상좌도병마우후(慶尙左道兵馬虞侯) 흠조(欽祖)이시며, 자는 해보(諧甫), 호(號)는 취애(翠厓), 휘(諱)는 응유(應兪)로 성균생원(成均生員)이며,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 및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선생 양문에 사사하여 문장과 덕행이 당세에 추중되었으며, 1606년 인흥에 인흥정사(仁興精舍,현 東溪書堂)를 짓고 장여헌(張旅軒), 손모당(孫慕堂), 이석담(李石潭) 등 제현과 벗이 되어 학문을 닦기도 하였다.
 1611년 정인홍(鄭仁弘)의 오현종사(五賢從祀)의 논의에서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 퇴계 이 황(退溪 李 滉) 두 선정을 무고하자 그 부당함을 변파하였고(회퇴변정(晦退辨正)), 박이립(朴而立)이 한강(寒岡)을 모함하자 상소하여 스승의 억울함을 해명하였다(한강변정(寒岡辨正)). 계축년(1613)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에 급제하였으며,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분의도유사(奮義都有司)로 천거되었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시에는 정경세(鄭經世)를 도와 상장으로 추대되어 활약하였다. 또한 기축옥사(己丑獄事)(1589년)로 희생당한 남명(南冥)의 문인인 최영경(崔永慶)을 위하여 "최수우당영경변무소(崔守愚堂永慶辨誣疏)"를 올려 풀려나게 하기도 하였다.
또한 장문의 축성선장(築城選將)의 책략을 입안 상주하였으며, 선생은 경험적 세계의 현실문제, 사회문제보다 도덕적 원리에 대한 인식과 그 실천을 중시하였다.
 한강(寒岡)이 예설을 모아들일 때 예서를 잘 쓰는 그에게 맡겨서"송조오현예설집(宋朝五賢禮說集)"의 편질을 완성하게 하였으며, 기묘 1639년 4월에 졸하였으며, 묘는 대구 송현동에 장하였으나 무오 1978년에 청도 각북면 율정 가동산 갑좌로 이장하였다.
 무자 2008년 묘하 백여보 지점에 동강재(東岡齋)를 마련하여 묘재로 사용하고 있다.
문집으로 "취애집(翠厓集)"이 있으며,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아우 낙음(洛陰) 경유(慶兪)와 함께 배향되었다.

소재지 : 경북 청도군 각북면 율정리 산 21

 

 

 

 

 

 

 

소재지 : 대구시 달서구 용산동 산1

증(贈) 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행 통훈대부평양서윤(通訓大夫平壤庶尹) 겸 평양진병마첨절제사(平壤鎭兵馬僉節制使) 도경유(都慶兪)

 증 병조참판(兵曹參判) 용천군수(龍川郡守) 원량(元亮)(17세)의 3자이시고, 경상좌우후(慶尙左虞侯) 흠조(欽祖)의 손자이시며, 자(字)는 내보(來甫), 호(號)는 낙음(洛陰), 휘(諱)는 경유(慶兪)로, 병신(1596)년에 생하시고, 취애(翠厓) 도응유(都應兪)의 동생이시다.
 한강(寒岡), 낙재(樂齋) 및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세 선생 문하에 수업하였고, 갑자 인조(仁祖) 2년(1624)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와룡산 남쪽에 낙음정사(洛陰精舍)를 지어 강학하셨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시 동궁(東宮)의 남원행가(南原行駕)를 호위하고 환궁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使)로 특제되었으며, 그 후 임금을 범하려는 유효립(柳孝立), 정 필(鄭 泌)의 역모를 상주하여 두 역적을 척결함으로서 그 공훈으로 寧 사일등공신(寧 社一等功臣)에 참록되었다.
 1629년 은률(殷栗), 하양현감(河陽縣監) 및 봉산군수(鳳山郡守) 등의 수령으로 선치하였는데, 은률에서 선생께서 어버이가 늙어서 모친곁에서 봉양하길 진주하였더니, 임금께서 특별히 명하여 하양현감으로 임지를 바꾸어 제수하시었다. 유사가 집이 가까운 곳이라는 것을 들어 부당하다고 아뢰었는데,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청백리(靑白吏)도 역시 집 가까이를 꺼리는 것이 있는가?"라고 하셨으니, 대개 특수하신 성은에서 나온 것이었다.
 1634년에 평양서윤으로 옮겨 임명되시니, 봉산군민은 "군수도경유만고엄명청덕비(郡守都慶兪萬古嚴明淸德碑)"라는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재임시의 치덕을 칭송하였다. 을해(1635)년에 평양 재임시에는 정묘호란(丁卯胡亂)에서 피랍되어 청나라에 억류된 포로환수의 도차사(都差使)로 임명되어 심양(瀋陽)으로 가서 전원 송환의 중임을 완수하였으며, 공의 선정에 어사 조수익(趙壽益)의 상계로 표리일습(表裏一襲)이 특별히 하사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중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심연(沈演) 및 충청병사(忠淸兵使) 이의배(李義培) 등과 협모하여 남한산성에서 역전하였으나, 쌍령전투에서 쌓아 놓은 화약의 폭발사고로 패전하였다. 얼마 후 그 죄로 평해군으로 유배 갔으나, 화약고 폭발사고가 전에 남한산성 전투에서 비장 박충겸(朴忠謙)의 잘못을 크게 꾸짖고 군률로 참수한 일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화풀이로 한 소행임이 밝혀져, 곧 용서하라는 은전을 받아 풀리었으나, 귀경 길에 양지에 이르렀을 때, 다시 그들의 소행으로 중도에서 해를 입고 사세하시니 향년 42세(1637년)였다. 그 후 1640년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로 추증되시었다. 문집으로 낙음집(洛陰集)이 있고, 병암서원(屛巖書院)에 백씨 취애공(翠厓公)과 함께 곤계로 배향하였다.

소재지 :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 산181-1​

 

 

 

 

 

 

소재지 : 경북 군위군 의흥

 

 

 

 

 

 

소재지 :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남평2리

경재공(景齋公)은 덕행(德行)과 문장(文章)이 뛰어나 사림(士林)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성주목사 황준량(黃俊良)이 부임하면서 도순신(都舜臣:경재공),송세례,이진경등 유학자(儒學者)에게 정사(精舍)를 짓게하여 명종(明宗) 신유년(1561)에 완공하니 칠곡군 신동 서쪽 건령산아래 녹봉정사(鹿峰精舍)이다. 퇴계선생이 명명하시고 친필로 편액(扁額)을 거니 사림(士林)이 높이 받들고 학풍이 드높았다. 황목사가 떠나면서 공을 추천하여 강장(講長)으로 삼으니 퇴계선생의 이념을 받들어 많은 후학을 배출하였다. 장자(長子) 16세(世) 휘(諱) 응복공(應復公)이 처음 대구 대명동 괘진(掛津)으로 이거(移居)하시었다. 손자(손자) 17세(世) 언경공(彦慶公)은 임란때 창의하여 군자감참봉(군資監參奉),증손 18세(世) 부윤공(富潤公)은 병자호란때 공(功)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이 되었다.

 

소재지 : 경북 성주군 선남면 선원리 종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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