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음공(洛陰公) 18世 휘(諱) 경유(慶兪)의 묘(墓)



증(贈) 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행 통훈대부평양서윤(通訓大夫平壤庶尹) 겸 평양진병마첨절제사(平壤鎭兵馬僉節制使) 도경유(都慶兪)

 증 병조참판(兵曹參判) 용천군수(龍川郡守) 원량(元亮)(17세)의 3자이시고, 경상좌우후(慶尙左虞侯) 흠조(欽祖)의 손자이시며, 자(字)는 내보(來甫), 호(號)는 낙음(洛陰), 휘(諱)는 경유(慶兪)로, 병신(1596)년에 생하시고, 취애(翠厓) 도응유(都應兪)의 동생이시다.
 한강(寒岡), 낙재(樂齋) 및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세 선생 문하에 수업하였고, 갑자 인조(仁祖) 2년(1624)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와룡산 남쪽에 낙음정사(洛陰精舍)를 지어 강학하셨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시 동궁(東宮)의 남원행가(南原行駕)를 호위하고 환궁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使)로 특제되었으며, 그 후 임금을 범하려는 유효립(柳孝立), 정 필(鄭 泌)의 역모를 상주하여 두 역적을 척결함으로서 그 공훈으로 寧 사일등공신(寧 社一等功臣)에 참록되었다.
 1629년 은률(殷栗), 하양현감(河陽縣監) 및 봉산군수(鳳山郡守) 등의 수령으로 선치하였는데, 은률에서 선생께서 어버이가 늙어서 모친곁에서 봉양하길 진주하였더니, 임금께서 특별히 명하여 하양현감으로 임지를 바꾸어 제수하시었다. 유사가 집이 가까운 곳이라는 것을 들어 부당하다고 아뢰었는데,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청백리(靑白吏)도 역시 집 가까이를 꺼리는 것이 있는가?"라고 하셨으니, 대개 특수하신 성은에서 나온 것이었다.
 1634년에 평양서윤으로 옮겨 임명되시니, 봉산군민은 "군수도경유만고엄명청덕비(郡守都慶兪萬古嚴明淸德碑)"라는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재임시의 치덕을 칭송하였다. 을해(1635)년에 평양 재임시에는 정묘호란(丁卯胡亂)에서 피랍되어 청나라에 억류된 포로환수의 도차사(都差使)로 임명되어 심양(瀋陽)으로 가서 전원 송환의 중임을 완수하였으며, 공의 선정에 어사 조수익(趙壽益)의 상계로 표리일습(表裏一襲)이 특별히 하사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중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심연(沈演) 및 충청병사(忠淸兵使) 이의배(李義培) 등과 협모하여 남한산성에서 역전하였으나, 쌍령전투에서 쌓아 놓은 화약의 폭발사고로 패전하였다. 얼마 후 그 죄로 평해군으로 유배 갔으나, 화약고 폭발사고가 전에 남한산성 전투에서 비장 박충겸(朴忠謙)의 잘못을 크게 꾸짖고 군률로 참수한 일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화풀이로 한 소행임이 밝혀져, 곧 용서하라는 은전을 받아 풀리었으나, 귀경 길에 양지에 이르렀을 때, 다시 그들의 소행으로 중도에서 해를 입고 사세하시니 향년 42세(1637년)였다. 그 후 1640년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로 추증되시었다. 문집으로 낙음집(洛陰集)이 있고, 병암서원(屛巖書院)에 백씨 취애공(翠厓公)과 함께 곤계로 배향하였다.

소재지 :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 산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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