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당공(靑松堂公) 응(膺)의 왕지(王旨)







충남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724호 도응 왕지

이 문서는 조선 태조 2~6(1393~1397)에 걸쳐 7() () () 노은(魯隱)선생에게 내린 사령왕지(辭令王旨) 4()와 녹패(祿牌) 1매이다.

 

() ()선생은 고려말(高麗末) 충신(忠臣)으로 두문동(杜門洞) 72인 중 한사람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중대광문하시중찬성사(重大匡門下侍中贊成事)를 역임하였는데, 이성계(李成桂)가 새 왕조를 창건한 후 다섯 차례에 걸쳐 관직(官職)에 소명(召命)하였으나 끝내 실직(實職)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문서의 왕보(王寶)는 왕지에 조선왕보(朝鮮王寶)’, 녹패에 선사지인(宣賜之印)’이 각각 찍혀 있다. 왕지는 뒤에 교지로 바뀌며, 새보도 태종 때에는 조선국왕지보(朝鮮國王之寶)’, 경국대전이 반포된 후에는 시명지보(施命之寶)’로 바뀌어졌다. 왕지는 조선 초에 일반적으로 사용된 초서체(草書體)로 쓰여졌는데, 고려 말의 관제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 초기의 특징과 성격을 지닌 이들 문서는 고문서 연구와 여말 선초의 관제와 새보의 변천과정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문서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임명교지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981715보물 제724로 지정되었다.

 

. 홍무 26(1393) 10월 태조2년 계유(癸酉).

왕지(王旨)도응위조봉대부전의소감자

(都膺爲朝奉大夫典醫小監者).

 

. 홍무 27(1394) 9월 태조3년 갑술(甲戌).

왕지(王旨)도응위선절장군흥위위자영장군자

(都膺爲宣節將軍興威衛左領將軍者).

 

. 홍무 28(1395) 213일 태조4년 을해(乙亥).

왕지(王旨)도응위선절장군용무위사좌령장군자

(都膺爲宣節將軍龍武衛司左領將軍者)

 

. 홍무 30(1397) 1210일 태조6년 정축(丁丑).

왕지(王旨)도응위보공장호용순위사섭대장군자

(都膺爲保功將虎勇巡衛司攝大將軍者)

 

. 홍무 27(1394) 9월 태조3년 갑술(甲戌)

녹패(祿牌)왕명 준사 선절장군 흥위위좌령장군도응

(王命 准賜 宣節將軍 興威衛左領將軍都膺).

금 갑술년록 제구과 일백칠십석급경창자

(今 甲戌年祿 第玖科 壹佰漆拾石給京倉者).

 

도응(都膺), ?~1387~?

본관은 성주(星州). 초명은 유(), 자는 자예(子藝), 호는 청송당(靑松堂)이다. 부친은 찬성사 길부, 조부는 문화시중 칠곡부원군 홍정이다. 두문동 72현 중의 한 명이며 해동보감기절문(海東寶鑑氣節門)의 두 번째 서열이다. 우왕 때 벼슬이 문화시중찬성사에 이르렀으나 우왕14년 이인임이 실각하는 과정에서 부친이 죽음을 당하고 일족들이 많이 화를 입었다. 이에 홍성군 노은동에 은거하였다. 도응이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성계와 절친하였으며 장인이 문화평리상의 우인열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개국 이듬해인 1393년 태조가 특히 옛 정을 생각하여 다섯 차례나 녹봉과 직첩을 내렸으나 한 달 동안 아홉 끼의 식사를 하는 삼순구식(三旬九食)의 절식으로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태조가 그의 곧은 절의(節義)를 찬탄하여 도응의 절개는 실로 옛 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도다. 내 차마 도응의 곧은 절개를 꺾지 못하는 도다.”라고 말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자손만은 곧 나의 신하로 삼아 마땅히 대대로 음직을 주어 기용 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와 함께 청송당이란 호를 내리고 몸소 절구시를 지어 특별히 중국 비단에 금으로 글을 써서 하사하였다. 이때의 왕지(王旨) 4매와 녹패(祿牌) 1매가 1981년에 보물 724호로 지정되었다. 우왕13(1387) 815일에 정몽주, 길재 등 13명이 고려태조가 후삼국을 통일 할 때 중요 결전지인 팔공산 동화사에 모여 고려 태조 왕건의 시 소사(所思)에 있는 호계삼소(虎溪三笑)’구절의 깊은 뜻을 감상하고, 열세명이 지은 연구(联句) 가 전해오고 있다. 도응의 시구는 십년동안 오로지 사명을 받들어 천고의 문화를 나타내도다(十年專使命 千古見文華)라는 것이다. 정몽주의 피살 소식을 듣고는 우리는 죽을 사()자 하나 뿐이니 죽음을 명백히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행적을 전하는 글로는 <청송당도선생실기><신도비문>이 있으며 묘지 가까이 경충제(景忠齊)가 있다. 1808년에 성주 운천서원에 배향되고, 1832년 장성 경현사(景賢司)와 개성의 두문동 서원에 모셔졌다. 200710월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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