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선사 선유도(琴湖仙査 船遊圖)-02

序文

 

이천장(伊川庄)이란 행보(行甫) 서사원이 사는 곳인데 행보는 정이천(程伊川)처럼 성리학(性理學)에 뜻을 두고 이천장에서 산다. 땅은 비록 수천만 리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하늘이 이런 이름을 지어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천의 물은 세차게 그치지 않고 흘러 낙동강과 합류하니 이것이 어찌 중국의 이락(伊洛)의 학문을 행보가 받아들여 자신의 것을 만들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덕회(德晦) 장현광은 행보와 뜻이 같은 벗인데 마침 인동고을 옥산(玉山)으로부터 와서 종유(從遊)한 자인데 모두 기약을 하지 않고 모여 무이서원(武夷書院) 도가(櫂歌)의 흥을 뒤따라 배를 타고 선사고사(仙査古寺)를 찾아갔더니 절 아래는 바로 유선(儒仙) 최치원(崔致遠)이 유람하던 곳으로 세월이 무상한 자취가 완연하였다.

 

그날 미풍이 그치지 않고 불고 하늘의 구름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둑과 꽃과 못가의 버드나무가 울긋불긋 10리에 비단병풍을 둘러친듯하여 참으로 거울같이 아름다워 사미이난(四美二難)1)을 모두 갖추어 인간세상 백년에 한번 만날 좋은 놀이였다.

층층 기암절벽과 멀리보이는 모래밭은 화필(畵筆)이 아니면 형상할 수가 없었다. 저녁노을이 살짝 깔릴 때 강에 배를 띄워 가니 강정(江亭)은 바로 진사 윤대승(尹大承)이 지은 것으로 병란(兵亂)에 불타버리고 윤 진사가 죽은 지 10여년이 채 안되었다고 한다.

 

황폐한 대()만 홀로 남아 저녁 비를 맞는데 대나무와 소나무 그림자가 빈뜰에 우거져 사람으로 하여금 무한한 감회를 일어나게 한다. 날이 저물려고 하여 남은 몇 칸 방으로 들어가 쉬려고 하는데 방이 좁아서 나와 사빈(士彬) 이규문은 다시 학가(學可) 이종문의 집으로 갔다.

 

날이 밝아서 여러 사람들이 뒤 따라 왔는데 새벽에 비가 내려 일행이 축축하게 젖은 옷이 바람에 날리니 마치 신선의 옷이 공중에 벌럭이는 듯했다. 배안에서 운자(韻字)를 내어 나누어 시를 지었다.

 

여러 현인들이 다투어 주회암(朱晦庵)의 절구를 따라 외웠는데 유독 진사 학가(學可) 이종문 만이 도리원(桃李園)에 앉아 짓지 못해 벌주(罰酒)로 세잔을 마셔야 했으니 이는 금곡원(金谷園)의 벌주 규정에 의한 것이다.

 

덕회(德晦) 장현광이 장() 자를 얻어 내가 그 뒤를 이어 읋고는 서로 바라보고 크게 웃고는 파했다. 헤어지려니 섭섭한 마음이 끝이 없는데 해가 이미 서산에 걸렸다. 아름다운 모임이 꿈만 같았는데 문득 전날의 일을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할 뿐이다. , 10년 동안의 전란을 격은 사이 그중 몇 사람이나 살아 있을 것인가?

 

또 비록 세상에 살아 있더라도 함께 다 같이 모일 수 있는 것이 몇 번이나 될 것인가? 지금 모이기로 기약하지 않고도 함께 모인 자가 23명이나 되니 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될 일이겠는가? 반드시 그렇게 시킨 자가 있을 것인데 누구인가를 모를 뿐이다. 종전에 헤어졌다가 모이고 모였다가 헤어진 것이 모두 하늘의 처분이었으니 다른 해 이날에 이 몸이 또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할 수가 없고 비록 모이더라도 또 다 모일 수는 없는 것이다.

 

또 후세 사람들이 오늘 우리의 모임을 사모하기를 오늘 우리가 옛날 사람들의 모임을 사모하듯 사모할 줄을 알겠는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수사(秀士) 김극명(金克銘)이 이런 아름다운 일이 후일 묻혀버릴 것을 염려하여 나에게 서문을 쓰라고 부탁하는데 내가 글을 잘 못한다고 사양할 수가 없었다. 해는 신축년이요 때는 늦은 봄 23일이다.

 

 

<1601(선조 34) 음력 323>

성산(星山)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는 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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