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강연조도(黃岡延詔圖)

낙음공(洛陰公)이 봉산 군수재임 시 조칙(詔勅)을 맞이하는 그림.

낙음공(洛陰公) 종중(宗中)에서 국학진흥원에 기탁 함. (20119)

   

 

 

< 황간연조도 그림 >

 

 

황강연조도는 규장각 소장 의순관영조도이래 명사 영접을 기록한 희귀본이다. 황강(黃岡)은 황주(黃州)의 다른 이름이다. 황주군은 황해도 대동강 하류 평양 남쪽에 있는데, 황주 땅이 중국의 황강과 너무 닮았고 아름다워서 조선의 황강이라고 불렀다. 연조(延詔)는 중국황제의 조서와 칙서를 맞는 의례를 의미한다. 황강연조도는 명나라에서 1634(인조 12) 사례감 태감 노유녕을 칙사로 임명하여 소현세자의 책봉 고명과 면복 및 채단을 보냈던 배경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황강연조도는 황주에서 명사 일행을 영접하였던 원접사와 종사관을 비롯해 관반으로 동원된 황해관찰사 오숙 이하 황해도 지역 지방관 명단이 좌목에 상세히 적혀 있어 그림의 제작 배경을 추정하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낙음공께서는 봉산군수로서 사절단을 맞이하였다. 황강연조도가 그려진 1634년을 전후한 시대적 배경은 명과 후금이 주도권 다툼을 하던 명청교체기로, 조선과 중국 간에 긴박한 대외 관계가 전개되던 때이다. 1634년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태감 노유녕은 조선의 영접 의주(儀註)에 개입하는 것은 물론 인정물품을 무리하게 요구하여 정묘호란 이후 황폐한 조선의 경제 상황에 큰 부담을 주었다.

 

이 그림은 2011821KBS 프로그램 ‘TV쇼 진품명품에서 방영 되었으며 3억원의 가치가 있다고 판정받았다.

 

황강연조도가 그려진 배경은 다음과 같다. 황주성의 남문을 중심으로 성관내부에는 병마절도사가 머무르던 병영과 병마우후(兵馬虞候)가 머무르던 중영등 군영을 비롯하여 목사가 집무하던 아사(衙舍)가 있다. 또한 객사인 제안관(齊安館)과 중앙에 종각이 있다. 성 동쪽에는 월파루(月波樓)가 있다. 남문 앞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남천(南川)이 흐르고 남천위에는 정자선이 띄워져 있다. 남천바로 옆에 병영의 훈련원이 있고, 성문 밖에 명사의 휴식과 연조준비를 위한 막차(幕次)가 두군데 설치되어 있다. 성내 깃발은 병영의 상징물이다. 황주성을 중심으로 주변산수는 거의 생략하여 조선 관반과 명사의 행렬이 성문으로 진입하는 장면을 보다 근경으로 부각시켰다. 행렬의 맨 앞은 황해도관찰사 오숙, 황주 영위사 박노를 비롯한 기마한 관반 17명을 마두(馬頭;역마(驛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사람)등 원역(員役) 18명이 호위하고 있다. 양산을 받치고 기마한 관원 3명은 양관(梁冠)에 적초의(赤綃衣)를 입은 조복(朝服) 차림으로 원접사 김신국, 종사관 구봉서와 정태화로 추증된다. 원접사 일행 바로 뒤로 황제의 의장을 상징하는 황의장(黃儀仗)이 등장하는데, 의장기, 황양산, 은횡과(銀橫瓜), 은립과(銀立瓜), (), () 등을 든 의장대가 앞서고 황제의 칙서를 실은 용정(龍亭)이 따른다. 의장대에 소속된 인원은 25명이며, 용정뒤에는 전립(氈笠)을 쓴 군복차림의 나장(羅將) 5명과 원역 5명이 그려졌다. 인물복식과 옥우는 녹색, 적색 등으로 비교적 진하게 체색되었다.

 

도경유 (都慶兪) 1596~1637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 용천군수(龍川郡守) 원량(元亮, 17)의 삼자(三子)이고, 경상좌우후(慶尙左虞侯) 흠조(欽祖)의 손자이며, 자는 내보(來甫), 호는 낙음(落陰), 취애(翠厓) 도응유의 동생이다. 한강(寒岡), 낙재(樂齋) 및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세 선생 문하에 수업하였고, 1624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와룡산 남쪽에 낙음정사(烙陰精舍)를 지어 강학(講學)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시 동궁(東宮)의 남원행가(南原行駕)를 호위(扈衛)하고 환궁(還宮)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使)로 특제(特除;특지(特旨)로써 벼슬을 시킴)되었다. 그 후 임금을 범하려는 두 역적을 토벌(討伐)하여 그 공훈으로 영사일등공신(寧社一等功臣)에 참록(參錄)되었다. 1629년 은율(殷栗), 하양현감(河陽縣監) 및 봉산군수(鳳山郡守) 등의 수령으로 선치(善治)하였는데, 은율(殷栗)에서 선생께서 어버이가 늙어서 모친 곁에서 봉양하길 진주(陳奏)하였더니, 임금께서 특별히 명하여 하양현감(河陽縣監)으로 임지를 바꾸어 제수하시었다. 유사(有司)가 집이 가까운 곳이라는 것을 들어 부당하다고 아뢰었는데,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청백리도 역시 집 가까이를 꺼리는 것이 있는가?”라고 하셨으니, 대개 특수하신 성은(聖恩)에서 나온 것이었다. 1634년에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옮겨 임명되시니, 봉산군민(鳳山郡民)군수도경유만고엄명청덕비(郡守都慶兪萬古嚴明淸德碑)”라는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재임시의 치덕(治德)을 칭송(稱頌)하였다. 평양 재임시에는 정묘호란(丁卯胡亂)에서 피납되어, 청나라에 억류(抑留)된 포로환수의 도차사( 리스트

비밀번호 :

낙음공 평양서윤(平壤庶尹) 재임 시 표창장
낙음공(洛陰公) 교지(敎旨)-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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