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암서원(屛巖書院)



1. 연혁(沿革)

  와룡산(臥龍山) 남쪽 대구광역시 달서구 용산동(일명 西村) 521번지에, 일찍이 1625년 을축 인조(仁祖) 3년 성주도공 경유(慶兪)선생께서 낙음정사(洛陰精舍)를 지어 수학(修學) 강도(講道)하였으며, 이후 이 정사(精舍)는 후손들의 종회당 겸 향내 학생의 상서(庠序)로 운영되어 왔다.
 1675년 숙종(肅宗)조에 이 곳에 병암서당(屛巖書堂)을 창건하여 후학 양성 및 사림 유생들의 강학 논경과 창의회합이 빈번하였던 곳이며, 1785년 을사 정조(正祖) 9년 향도 사림의 공의로 병암서원(屛巖書院)으로 승호(陞號)되어 취애·낙음(翠厓·洛陰) 양 선생을 배향하였다.
  취애공(翠厓公)과 낙음공(洛陰公)은 형제간으로, 취애공(翠厓公)이 삼형제 중 맏이이시고, 낙음공(洛陰公)이 막내이시며, 아버지되시는 참판공(參判公) 원량(元亮)은, 경상좌도병마우후(慶尙左道兵馬虞侯)이셨던 우후공(虞侯公) 흠조(欽祖)의 네 아들 중 셋째이시고, 양직당공(養直堂公)과 서재공(鋤齋公)의 숙부로, 용천(龍川), 청도(淸道), 초계군수(草溪郡守)를 역임하시었고, 후일 낙음공(洛陰公)의 참영 사일등공(參寧 社一等功)으로 병조참판(兵曺參判)으로 추증(追贈)되시었다.

 이 서원은 고종(高宗) 원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에 훼철되고, 사림봉향이 중지되었다.
 1924년 갑자 동지종회에서 원·사(院·祠)의 복건(復建)을 의결하고, 을축년에 강당·묘우 등을 완공하였으며, 1982년 임술에 향내 사림의 복원 결의로 2년여에 걸쳐 묘우·궁장(廟宇 宮牆)을 개축수리하고, 1984년 갑자 3월에 시축지의(尸祝之儀)를 다시 봉행하여 오다가,
1996년부터 대구시의 도시개발계획에 의거 토지의 수용 및 지형의 변경등으로 사림봉사(士林奉祀)를 일시 중지하고 본손봉사로 대행하면서, 2000년 경진 8월에 구원을 철거 이건하고, 이 유지(遺址)를 중심으로 1200여평의 부지에 사당, 강당, 동재, 서재 및 외삼문 등 목조건물 10여동과 회관, 지하주차장 등 연건평 560여평을 새로 건립 조성하는데 총공사비 60여억원을 투자하여 2003년 계미 5월에 준공하였다.

2. 배향 인물(配享 人物)
 이 서원에는 취애공 도응유(翠厓公 都應兪)선생과 낙음공 도경유(洛陰公 都慶兪)선생 두 분을 곤계(昆季)로 배향하고 있다.

가) 취애공 도응유(翠厓公 都應兪)선생

   취애공 도응유(翠厓公 都應兪,1574~1639)선생의 자(字)는 해보(諧甫), 호(號)는 취애(翠厓), 휘(諱)는 응유(應兪)로 성균생원(成均生員)이며, 한강 정 구(寒岡 鄭 逑)선생 및 낙재 서사원(樂齋 徐思遠)선생 양 문에 사사(師事)하여 문장과 덕행이 당세에 추중되었으며,
 1606년 인흥에 동계정사(東溪精舍,현 동계서당 )를 짓고 張旅軒(張旅軒), 손모당(孫慕堂), 이석담(李石潭) 등 제현과 벗이 되어 학문을 닦기도 하였다.
 1611년 정인홍(鄭仁弘)의 오현종사(五賢從祀)의 논의에서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퇴계 이 황(退溪 李 滉) 두 선정을 무고하자 그 부당함을 변파하였고(회퇴변정,晦退辨正), 박이립(朴而立)이 한강(寒岡)을 모함하자 상소하여 스승의 억울함을 해명하였다(한강변정,寒岡辨正).
 1624년(仁祖 2)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분의도유사(奮義都有司)로 천거되었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시에는 정경세(鄭經世)를 도와 상장으로 추대되어 군교를 배포하고 군량을 경리하였다.
 또한 기축옥사(己丑獄事)(1589년)로 희생당한 남명(南冥)의 문인인 최영경(崔永慶)을 위하여 "최수우당영경변무소(崔守愚堂永慶辨誣疏)"를 올려 신원(伸寃)이 되게도 하였다.
 또한 장문의 築城選將(築城選將)의 책략을 입안하였으나 끝내 상주하지는 아니하였다.
 선생은 경험적 세계의 현실문제, 사회문제보다 도덕적 원리에 대한 인식과 그 실천을 중시하였다.
 한강(寒岡)이 예설(禮說)을 모아들일 때 예서(隸書)를 잘 쓰는 그에게 맡겨서
"송조오현예설집(宋朝五賢禮說集)"의 편질을 완성하게 하였으며, 문집으로 "취애집(翠厓集)"이 전해진다.

 

 나) 낙음공 도경유(洛陰公 都慶兪)선생

  낙음공 도경유(洛陰公 都慶兪,1596~1637)선생의 자(字)는 내보(來甫), 호(號)는 낙음(洛陰), 휘(諱)는 경유(慶兪)로, 앞서 말한 취애 도응유(翠厓 都應兪)의 동생이다. 한강(寒岡), 낙재(樂齋) 및 모당 손처눌(慕堂 孫處訥) 세 선생 문하에 수업하였고, 갑자년에는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와룡산 남쪽에
낙음정사(洛陰精舍)를 지어 강학하시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시 동궁(東宮)의 남원행가(南原行駕)를 호위하고 환궁 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使)로 특제(特除)되었다. 그 후 임금을 범하려는 두 역적을 토벌하여 그 공훈으로 영 사일등공신(寧 社一等功臣)에 참록되었다.
 1629년 은률(殷栗), 하양현감(河陽縣監) 및 봉산군수(鳳山郡守) 등의 수령으로 선치하였는데, 은률에서 선생께서 어버이가 늙어서 모친 곁에서 봉양하길 진주하였더니, 임금께서 특별히 명하여 하양현감(河陽縣監)으로 임지를 바꾸어 제수하시었다. 유사가 집이 가까운 곳이라는 것을 들어 부당하다고 아뢰었는데,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청백리(靑白吏)도 역시 집 가까이를 꺼리는 것이 있는가?"라고 하셨으니, 대개 특수하신 성은에서 나온 것이었다.
 1634년에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옮겨 임명되시니, 봉산군민은 "군수도경유만고엄명청덕비(郡守都慶兪萬古嚴明淸德碑)"라는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재임시의 치덕을 칭송하였다. 평양 재임시에는 정묘호란(丁卯胡亂)에서 피랍되어 청나라에 억류된 포로환수의 도차사(都差使)로 임명되어 심양(瀋陽)으로 가서 전원 송환의 중임을 완수으며, 공의 선정에 어사 조수익(趙壽益)의 상계로 표리일습(表裏一襲)이 하사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중에 경상도관찰사 심연(沈演) 및 충청병사 이의배(李義培) 등과 협모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역전하였으나, 쌍령전투(雙嶺戰鬪)에서 쌓아 놓은 화약의 폭발사고로 패전하였다. 얼마 후 그 죄로 평해군으로 유배 갔으나, 화약고 폭발사고가 전에 남한산성 전투에서 비장(裨將) 박충겸(朴忠謙)의 잘못을 크게 꾸짖고 군률로 참수한 일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화풀이로 한 소행임이 밝혀져 곧 용서하라는 은전을 받아 풀리었으나, 귀경 길에 양지(陽智)에 이르렀을 때, 다시 그들의 소행으로 중도에서 해를 입고 사세하시니 향년 42세(1637년)였다.
 그 후 1640년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로 증직되시었다.
 유물전시실에는 각종 교지와 문집목각판 및 많은 유지들이 전시되고 있다.
문집으로 "낙음집 상하(洛陰集上下)"가 있다.

3. 교육적 활용

 2003년 준공 후 선조의 유지에 따라, 서원이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토록 함이 본 뜻이라, 년중 항상 사람들이 드나들며 배우고 익히는 곳이 되도록 최선을 다 하고 있다.
  1) 우선  경로효친사업으로 80세가 넘는 남녀 원로 종인들께, 설과 추석에 세찬, 절찬의 형식으로 금일봉을 드려서 그 동안의 노고에 대한 감사의 정성을 표하고 있으며,

  2) 또한 후진양성을 위한 장학사업으로 매년 8월 15일에, 당해 년도 대학진학생(병암종중 후손)들에게 진학 격려 장학금을 지급하여 면학을 독려하면서, 조상을 공경하는 뿌리교육과 생활예절교육을 실시하기도 한다.

  3) 사회교화사업으로 인근 유치원, 초등학생들의 관람 및 체험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으며, 초·중·고등학생들에게 희망에 따라 1일과정으로 서원과 유학 및 생활예절교육을 매년 실시하고 있다.
  4) 최근에는 성주도씨 후손중 대학교 재학생 30~40명을 1박2일 과정으로 유학의 기초교육, 뿌리교육 및 생활예절교육을 여름방학 때마다 성주도씨대종회(星州都氏大宗會) 주관으로 실시하기도 하였으며,

  5) 그리고 서원스테이교육의 일환으로, 2008년에는 성균관 한림원생(成均館 翰林院生) 40여명이 본 서원에 와서 4박5일 과정으로, 강사를 서울에서 모셔 와 임간수업(林間授業)을 실시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성균관대학교 유도대학(成均館大學校 儒道大學) 및  양현재(養賢齋) 학생 70여명이 4박5일 과정으로 임간수업을 실시하는 등, 성균관 한림원과 성균관대학 양현재 학생들이 매년 교대로 4박5일 과정으로 임간수업을 실시하고 있다.

  6) 그리고 부녀자를 대상으로 2004년 부터 생활예절교육과정(生活禮節敎育過程)과 茶禮敎育過程(茶禮敎育過程)을 설치하여, 1학기(18주) 기준으로 30~40명 단위로 기초반과 전문반 까지 연계교육을 (사) 예절원(社 禮節院) 원장 채일선교수(院長 蔡一先敎授) 주관, 본 서원 후원으로 7년째 실시하고 있으며,
  2011년부터는 예절·다례교육 지도자과정을 개설하여, 1년간 수료 후 지도자자격인정서를  수여하기로 하여, 현재 12번째 성황리에 실시 중이며, 수강료와 강사료를 무료로 실시하고 있다.

  7) 또한 교육기반조성사업으로, 취애공 후손 도종이(都鍾伊) 국회의원의 헌성금 1억원으로, 중국의 유명한 도서 "사고전서(四庫全書)" 1500권을 위시하여,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500여권, 한국역대문집총서(韓國歷代文集叢書) 및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영남 각문 현조들의 문집 국역본 등 3,000여권의 도서를 비치한 문고를 설치하여 뜻있는 유림들에게 활용하도록 하고있다.
  8) 그 외에 지역사회 기관이나 각급단체에서 교육이나 회합의 장으로, 3층 대회의실(100여명 수용)과 식당(100여명 수용)을 항시 무료 대여하고 있으며, 결혼식장(신식 및 구식 전통혼례)으로도 제공하고있다.

  9) 앞으로 사서오경(四書五經) 강론까지 실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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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목판(文集木板)


18세(世) 휘(諱) 응유(應兪) 자(字) 해보(諧甫) 호(號) 취애(翠厓)선생과 18세(世) 휘(諱) 경유(慶兪) 자(字) 내보(來甫) 호(號) 낙음(洛陰)선생 형제분의 문집목판(文集木板) 원본(原本) 300여매가 지금도 보존되고 있으며, 처음 사용했던 기와 500여매를 아직도 보관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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