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음공(洛陰公) 도경유(都慶兪)선생이 남기신 유고(遺稿)에 황강연조도(黃岡延詔圖)가 있다.
황강(黃岡)은 대동강 하류 평양(平壤) 남쪽 황해도(黃海道)에 황주군(黃州郡)이 있는데, 황주(黃州) 땅이 중국에 있는 황강(黃岡)과 너무 닮았고 아름다워서 일명 조선의 황강(黃岡)이라고 불렀다.
황강연조도(黃岡延詔圖)는 황주(황강)에서 중국 황제의 조서(詔書)를 맞이하는 행렬을 그린 그림이다.
조선조 인조(仁祖) 11년(1633)에 낙음공(洛陰公)께서 봉산군수(황주군 바로 남쪽)로 제수되시어 가신 얼마 후, 중국 명(明)나라 황제가 보내는 조서를 맞이하는 행사가 황주(황강)에서 마련되었는데, 이 때 나라에서는 원접사(遠接使)로 보국숭록대부행중추부사(輔國崇祿大夫行中樞府事) 김신국(金藎國)을 명하고, 이하 영위사(迎慰使) 3명, 원접사종사관(遠接使從事官) 3명, 도차사원(都差使員) 2명 및 각무차사원(各務差使員) 14명 도합 23명이 명나라 사절단(使節團)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때 황주성(황강) 앞에서 사신을 맞이하는 행렬을 왕께서 황문(黃門,화공들 부서)에 명하여 행사도를 그리게 하여, 참여한 영접사 23명에게 1부씩 나누어 주게 하였으니, 그 중 비문(鄙門)이 하사받은 그림이 오늘까지 보관되어 세상에 알려 지게 되었다.
이때 낙음공(洛陰公)은 봉산군수(鳳山郡守)로 각무차사원(各務差使員) 중 일원이었고, 공의 자형인 회곡(晦谷) 남 선(南 銑)선생은 해주목사(海州牧使)로 도차사원(都差使員)이시었다.
이와 비슷한 그림이 하나 있으나 그것은 그림부분만 있는 의궤형식(儀軌形式)이고, 여기 황강연조도(黃岡延詔圖)의 특징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제일 위에 그림의 제목이 쓰여 있고, 다음 행사 내용이 그려져 있으며, 아래 부분에 행사에 참여한 영접사(迎接使) 23명의 이력 즉 관직, 성명, 자, 생간지, 과거합격 년도와 시험종류, 본관 등이 상세히 도표식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이 다른 어느 그림(의궤)과도 다른 특징이다.
서울에서 고서점을 하시는 김시한(金時漢)씨가 이 그림의 중앙 일부(의궤)만 있는 그림을 30여년전에 접하고, 본체를 알려고 오랜 세월 고심하던 차에 우연히 낙음문집(洛陰文集)을 접하게 되어, 문집 끝부분에 목각으로 그려져 있는 연조도(延詔圖)를 보고 너무 닮았다고 생각하여 수소문 끝에 병암서원(屛巖書院)으로 연락이 와서 여러 차례 교신한 결과 동일한 그림임을 확인하고, 전문가에게 감정을 받아 KBS와 연결이 되어 본작품의 역사적 가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진품명품(珍品名品) 프로에 출연하게 되었다.
당시 평가결과 첫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반의궤와 달리 3단구조로 된 것은 처음 발견된 것이고, 두 번째로 병자호란 이전의 그림이 이렇게 잘 보관된 것도 아주 드물다는 것이며, 세 번째로 왕조실록(王朝實錄)에 기록이 없는 역사적 사실이 그림으로 증명되었다는 것으로, 보관상태만 좀더 좋았으면 10억원의 가치가 넘으나 지금 상황으로는 3억원의 가치가 있다고 판정을 받았으며, 이후에 또한 동일한 작품이 다른 가문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역사적 가치는 몇 배가 될지 짐작하기 어렵다고도 하였다.
조서(詔書)를 맞는 행사가 있은 때는 후금(後金,후에 淸나라)이 1627년에 정묘호란을 일으킨 6년후 즉 1633년이라 명말 청초(明末 淸初)에 친명파와 친청파로 양분되어 있는 조정으로써 대외적으로 아주 어려운 시기이므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행사 자체도 갑론을박의 정국 속에서 조심스레 이루어진 일이었고, 이와 연장선상에서 인조대왕(仁祖大王)의 외교에 불만을 품은 후금(後金,淸)이 3년 후 다시 난을 일으키니, 이것이 곧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국왕(國王)이 치욕을 치루기도 했었다. 그래서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연조행사(延詔行事)의 기록이 왕조실록(王朝實錄)에 안 보인다는 사실이 안타까우나 KBS 방영 현장에서 이 그림 자체가 역사의 한 장면이고 생생한 기록이라고 정의하였다.
병자호란 이전의 작품으로 400여년 가까이 긴 세월을 이 정도로 잘 보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 받기도 하였다. 문집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23명의 참여자 각문에 한 점씩 고루 하사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방송이 나가고 7年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어느 집에서도 "우리도 있다"는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희소가치는 또 몇 배 더 상승할 것으로 사료된다.
작품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진품은 박물관(博物館)에 보관하고, 복사품(複寫品)을 만들어 후세교육과 홍보용으로 병암서원에 전시하여 교육용으로 활용하고 있다.